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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추억뒤지기..베네치아1

remis75 2005. 6. 12. 23:42

지난기억을 뒤져서 끄적여봤다.. 아무래도 또 가야겠다..

베네치아를 밟아보기 전에 베네치아를 생각하면, 늘 동남아시아의 보트피플들이 머물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통로와 수상가옥을 생각하여 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럴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브루크왕가의 오스트리아의 대도시 빈을 돌아보고, 이탈리아의 첫 여행지 베네치아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올랐을때,이탈리아영화에 나오는 퉁퉁한 중년남성의 이미지를 풍기는 이탈리아 남자와 같은칸에 오르게되었을때는, 그남자로부터 풍기는 쾌쾌한 냄새와 혼자서 궁시렁대는 말투로인해 이탈리아여행에 대한 기대가 반쯤은 줄어들었다. 여행전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반쯤은 집시들과 소매치기, 강도에 대한 얘기가 썩여서 나오므로, 이런 꼬질꼬질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마딱들였을때는, "고난의 시작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들기 마련이라 생각되었다.

새벽7시.. 베네치아의 도착을 알리는 역장의 방송이 나왔다. 안경을 집어쓰고, 머리를 대강정리하고, 쿠셋의 문을 열고나와 통로의 난간에 기대어 창밖을 보았다. "모야?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어디있는거야?"베네치아 메스뜨레역에서 내려 밖을 보니 그져 유럽의 고요한 주택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평안한 일요일의 아침.. 호텔에 짐을 맏기고, 실망에 실망을 않고, 기차를 이용해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으로 이동한다. 베네치아의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미리부터 실망에 실망에 또 실망을안고 있었기에, 그다지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져로마를 보기 위한 하루짜리 여행이다라고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으로 향하였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사로 기차가 들어섰다.지난날 오스트리아 여행을 망쳐놓은 흐린하늘이 조금씩 개이기 시작했다.플랫폼을 빠져나와서 역의 입구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입구쪽에서강한 햇빛이 서서히 나를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11월의 유럽의 햇빛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강렬한 빛이었다. 입구를 10여미터 남겨두었을때, 저멀리 보이는 대운하의바다가 보였다. 그 너머 중세시대 건물들이 보였다.바다를 비추고 나를 비추고 베네치아의 건물을 비추는 강렬한 태양이 하늘에 나타났다.역을 나섰다. 와~~ 이런~이런~ 이것이 베네치아구나.. 저 물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건물을 봐봐..여행동행들을 서로 마주보고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실망이 크면 기대가 큰 법인가? 그동안의 실망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오른 바포레또에서 바라본 베네치아는 나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었다. 정말 이런 아름다운 도시가 있단 말인가?


베네치아의 중심.. 리알토다리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리주변은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와 좌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리알토다리를 베네치아의 중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혀 베네치아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져 강렬한 태양이 빛치는 리알토다리의 경치가 예술이었을 뿐이다.

베네치아 여행의 정점은 싼마르코광장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베네치아를 점령했을때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느 여행가이드북이건 다써있다. 겨울의 베네치아는 조수간만의 차로인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리곳곳이 물이 차있는 경우가 있다. 오후가되면 빠지기도 하지만, 이로인해 리알토다리에서 싼마르코광장으로 가기위해 본이 아니게 베네치아의 골목 곳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중세의 베네치아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듯 하다. 흠~~ 아~~ 베네치아공화국은 도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1000년이나 존속했다고한다. 이 작은 도시가.. 이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도대체 어떡게 이 작은 나라가 그렇게 오랬동안 유럽의 중심에서 활약 할 수 있었는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져 나의 짧은 식견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문득 베네치아에 대하여 알고싶어졌다. 아는것이 없다는 것은 보는것에 대한 매력을 반으로 줄여준다는 진실을 베네치아에서 더욱더 절감했다. 모든것이 볼 것이지만, 무엇인가 하나가 빠져있는 느낌..

이런 나의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베네치아에 대한 매력을 더 높여났는지 모르겠다.

수세기동안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로마제국의 몰락의 시점에 이민족의 침입은 극심했다고한다. 베네치아도 예외는 아니었고, 베네치아의 사람들은 제국의 힘도 빌릴수 없고, 그들 스스로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주가 최선이었고, 그들이 택한 곳이 개펄지대이었다. 개펄지대는 적이 침입해 오지도, 오고싶지도 않은 지역이지만, 그들이 살아가기에도 역시 척박한 땅이다. 따라서 그들이 살아가기위해 지반공사를 하고 집을 올리고, 민물과 접하지 않으므로 식수의 확보를 위해 우물을 만들고, 물위에 세워진 도시이므로 홍수를 대비한 운하시설을 조성하고 이런것이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져서 지금의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되었다. 지금의 아름다운 베네치아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인, 먹고살기위한 그저 단순한 삶과의 전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조금은 맥빠지는 일이다.지금처럼 전원도시를 개획하고 만든다는 것이 불가했던 그 당시로서는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었을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의 이탈리아인들은 우연이 만들어낸고난을 극복한 훌륭한 조상들 덕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이러한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지 모르겠다. 다시말해 조상 잘 둔 덕이리라..

외적의 침입을 피하기 위한, 조금은 약함이 숨어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도시치고는 너무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은 그후 10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를 완성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베네치아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들은바에 의하면 베네치아는 150여개의 섬과 180여개의 운하와 410여개의 다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떤것이 섬이고 어떤것이 운하라고 할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개펄위에서 그들의 살아갈 집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이끌어낸 베네치아인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 수많은 다리 중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리가 리알토다리와 탄식의 다리이다. 탄식의 다리는 지하감옥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지하감옥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수 없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카사노바가 또한 유명하게 만든 다리이기도 하다. 리알토다리 위에 섰을때는 이곳이 왜 베네치아 여행의 시작점이고 중심점인지 잘 몰랐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리알토다리를 서면, 이곳이 베네치아 상권의 중심지라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대운하중심에 있는 리알토다리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이 즐비했었고, 중세유럽에서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은행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리알토다리를 중심으로 대운하를 따라서는 베네치아의 부호들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금의 대운하 주변의 집들이 그당시 부호들의 집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상무역에 종사하고, 배의 접안이 유리한 곳에 대상인들이 집과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시된다.

베네치아의 최고의 호텔이라고 불린다는 "다니엘리"호텔을 들리면 중세의 고급주택을 느낄 수 있다고는 한다. 여행중 만난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하루묶고 거지되서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조금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을때 한번은 들려 볼까한다.

베네치아인들은 상인이다. 그래서인지 중세의 여느국가와는 다르게 무교에 가깝다고 한다. 물론 국교는 기독교이었고, 간혹 교황도 배출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이집트와 비잔틴제국등 비 기독교계와의 유리한 교역을 위해서는 때로는 반 기독교적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하기도 하고,4차십자군 원정을 베네치아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또한 여느 유럽의 국가들처럼 그들이 상징으로 삼는 성인이 있었다.그리스도 12사도 다음가는 네명의 성인인 성 마태오, 성 루가, 성 요한, 성 마르코 중의 한명인 성 마르코를 그들의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이들 네명의 성인에게는 각각의 상징의 동물이 있었는데, 성 마르코는 부활을 의미하는 사자이다. 이런 연유로 날개달린 사자가 베네치아의 상징이 되었고, 베네치아를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로마에 있는 베네치아광장의 오른편 건물에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사관으로 썼던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벽에서도 날개달린 사자를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베네치아의 상징이 성 마르코는 아니었다고 한다.9세기경 이슬람이 국교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종종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성마르코의 시신을 모시고 있는 수도원에 대한 탄압도 발생하였는데,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수도원에 대한 보상을 넉넉히 해주고, 성마르코의 시신을 베네치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싼마르코 성당의 정면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달린 사자와 더불어 청동의 네마리의 말이 있다.

이 네마리의 말은 처음에는 로마의 네로황제의 개선물 위를 장식했으나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가서 그 곳 경기장의 문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기사들에 의해 조직되고 베네치아가 해상운송을 맏은 4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제국이 성립되므로서 당시의 세계최고의 국제도시의 유물들은 프랑스 및 베네치아인들의 차지가 된다. 이로인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던 네마리의 청동말은 베네치아로 옮겨와서 이곳 싼마르코 성당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틴 제국의 상당한 도시에서의 라이벌 해상 국가를 제치고 독점하다시피 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4차십자군은 처음은 이집트로 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국가원수 엔리코 단돌로의 꾀임에 빠진 십자군들은 본의 아니게 아드리해 연안의 그리스도국가를 침공하기도 하였고, 이로인해 한때 교황에 의한 파면도 당하기도 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비잔틴제국을 공격하여 궁색한 모습을 갖춘 4차십자군 전쟁을 끝내게 된다. 4차십자군 전쟁의 최대 수해자는 베네치아 였고, 이로인해 역사가들에 의해 베네치아가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한다고 하자만, 베네치아인은 장사꾼으로서 그들이 믿는 신념을 다했으므로, 나는 그들은 나름데로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졸리다~~ 담에 다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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